OTJUNGRI6 with 7979 2020.9.17 – 9.20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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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운 Jiun Kwon / Weave Wave


지난 순간을 곱씹는 성격 탓인지, 어떤 옷을 보면 그 옷을 입었던 때를 추억하곤 한다. 옷을 입을 때 주어진 순간이나 상황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일까?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을 때, 전문적으로 보이고 싶을 때, 여행을 떠나 비일상적인 순간을 맘껏 즐기고 싶을 때 입는 옷이 모두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이 스커트는 해가 따뜻할 때 입었다. 해를 양껏 받을 수 있는 여행을 떠났을 때도 입었다. 트로피컬 컨셉으로 옷을 맞춰 입고 공원에 누워 맥주를 마시던 베를린에서의 여름이, 차를 타고 달리다 바다에 들러 땅따먹기를 하던 미국 서부 어딘가에서의 여름이 담겨 있다. 해가 아직 따뜻할 때 누군가와 이 옷을 통해 서로의 순간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렌다.


미술과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이솜이, 이유진과 함께 시각 예술 콜렉티브 위브웨이브(Weave Wave) 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올해엔 wrm의 지원을 받아 프로젝트 를 진행 중이다.


instagram @lets.weavewave


김가영 Kai Kim / OBJEKT


A.P.C. MADRAS 슬리브리스 톱. 모든 건 타이밍이라는데, 옷에도 타이밍이 있나 보다. 빨간색 비키니와 함께 입고 다른 나라 어느 해변에 누워 있을 나를 상상하며 구입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나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비키니가 아니라 진이나 스커트와 함께 평상시에 입어볼까? 아니다. 이렇게 귀여운 옷은 애초에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길이 때문일까? 애매했던 길이도 조금 잘라냈다. 그래도 역시 잘 입어지지 않았다. 그사이 나는 다른 나라 어느 해변에 누워 있을 일이 생겼다. 빨간 비키니를 입고. 그런데 그곳에 이 옷은 없었다. 해외에 거주하는 동안 이 옷을 입을 일이 없으리라 판단한 나는 완벽한 타이밍에서 이 옷을 빼버린 것이다. 아아. 애초에 우린 맞지 않는 운명인가 보다. 조금은 어색한 너의 두 번째 단추처럼.


스타일리스트. 유니섹스 액세서리 브랜드 OBJEKT 운영 중.


instagram @kaikaikimkim, @objekt.kr


김나라 Nara Kim


많은 옷 중 과연 어떤 아이템이 나를 대표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활동 초반에 꽤 의미 있었던 옷을 가져왔다. 2019년에 글로벌 하이엔드 패션 커뮤니티 쇼핑 플랫폼 FARFETCH와 협업했던 옷이다. 처음으로 글로벌 매체와 작업을 하다니, 하고 기뻐했던 게 벌써 작년 여름. AMBUSH의 맨투맨. 가격이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반 맨투맨과 달리 태슬 같기도 하고 유기체 같기도 한 줄들이 달린 디테일을 볼 수 있는데, 흔히 SF 애니에서 보던 기계 선 같기도 하고. 맨투맨 아랫단에 달린 줄을 찰랑거리며 서울 바닥을 훑고 다니는 내 모습을 스스로 ‘퓨쳐 히피’라 칭했던 이력이 있다. 이미 콘텐츠로 만들었던지라 다시 입기 어려웠던 옷이라 눈길로만 더 입었다. 데님과의 조합도 좋고, 치렁치렁하게 작정하고 입어도 좋겠다. 아직 태그도 떼지 않았지만 소매에 작은 얼룩이 있다.


김나라. 27세. 서양화를 전공했으며 현재는 서울을 기반으로 런던 및 파리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글로벌 인플루언서 @naras._ 계정을 운영하는 관리자이다. 최근 프리랜서 스타일리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naras._ 계정을 통해 패션뿐만 아니라 오픈 퀴어로서 여성과 소수자에 관련된 콘텐츠 및 활동도 하고 있다. 언젠가 로그아웃하여 자연으로 회귀하는 날을 고대하며 작업을 위한 소스를 모으는 중이다. 좋아하는 색은 언제나 파랑이다.


instagram @naras._


김솔이 Kim Sollee / Keygen


당시 중노동을 하던 나에게 신체는 주요한 사안이었다. 이 끔찍하고 무거운 몸을 벗겨내고 싶었다. 누적된 신체의 피로는 욕망 표출적 소비에 가담한다. 작은 스크린에 담긴 클럽 문화 민망 복장들은 인지하고 있는 신체를 잊기 위해 충분했다. 킨키(Kinky)는 허용되는 공간이 극히 드문 점, 방수나 내열의 기능과 같은 효용성의 논리로부터 이탈해 있다. 혼선을 빚거나 망각해 버리거나 생산적이지 않으려는 일종의 비밀, 놀이로써 입었던 것 같다. 작업복과는 반대로 위험할수록 안정감을 주는 옷이다.


몸을 움직여 조각을 만들고 몸을 움직이지 않고 음악을 틉니다. 조각, 설치, 프로덕션 등의 물질 매체와 웹사이트, 사운드, 이벤트 기획 등의 비물질 작업을 진행하며 그 두 영역의 연결 가능성에 대해 탐구한다. 매체와 매체 간의 유연한 연결점을 고안하고 설계하고자 한다.


instagram @keygen_personna_1.7


김을지로 Uljiro Kim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고사리 같은 것들. 미지근한 물 속에서 간지럽게 일렁이는 포자들. 청록색 배경. 순전히 패턴이 마음에 들어 데려왔던 드레스. 한창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났을 적 모임 장소에 입고 다녔었다. 늦가을 해 질 녘 루프탑에서의 네트워킹 파티. 낯선 이들과 섞여 단체 사진 찍기. 돌이켜보니 머리색도 옷도 밝고 화려했던 시절이다. 나는 검은 머리로도 밝은 머리로도 만족스럽게 소화하진 못한 것 같다. 누군가 유니콘처럼 레인보우 머리를 하고 착용해 주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공상 과학이 매일같이 현실을 전복하는 세대의 사람. 3D로 무언가를 만들기보다 누군가와 어딘가를 만들기 좋아한다. 현실의 단일 생물을 조직하는 단위를 주관적인 감상으로 재구성, 가상 현실에 배양시키는 보다 논리적인 방법에 대해 탐색하는 중이다. 여름엔 차갑고 겨울엔 따뜻한 반려동물 이무기와 7년째 함께 살고 있다. 언젠가 거실에는 그랜드피아노를 두고, 무기에게 방을 한 칸 내어줄 수 있는 집에 살고 싶다는 야망을 품고 있다.


instagram @uljiro, @uljiro.tv


김지연 Jiyeon Kim / Lay Poetry


새까맣고 좀 이상한 방식으로 빛나는 이 원피스는 어떻게 어둑한 옷장 한 켠에서 납작하게 번쩍이고 있게 된 걸까. 당장 뭔가를 사야 할 것 같은 충동이 들이칠 때는 왜 꼭 안 어울릴 것이 분명하고, 편하지도 무난하지도 않으며, 입고 어디에 있어야 좋을지 어울리는 공간조차 상상하기가 쉽지 않은 옷을 사고 싶은 걸까. 저 조건에 완벽히 부합했기에 옷장에 자리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옷장을 지키게 된 이 원피스는 딱 한 번 옷장의 어둠을 벗어난 적이 있었다. 요란하게 캄캄한 동시에 요란하게 밝은 서울의 밤에 본 얇고 바스락거리는 인조 가죽은 꼭 재현에 절반만 성공한 인조 박쥐의 날개처럼 보였다. 사진을 찍기 위해 몇 년 만에 다시 옷을 꺼내 밝은 곳에 두었다. 랩스커트 형식으로 된 하의 부분의 리본도 묶고, 모양을 잡아 걸어두니 사람의 어깨와 가슴 대신 가슴 부분의 검은색 스팽글 장식을 인조가죽이 어색하게 감싼 모습은 검고 빛나는 광물을 껴안고 잠든 박쥐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시의 밤 빛, 사람이 만든 반짝거리는 그 빛들이 사람이 만든 가죽으로 된 이 옷의 표면에 어떻게 닿아 흘러내리고 반사될지 상상해본다. 이 장면 속에서 걸어갈 멋진 사람도.


시를 쓰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2019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디자인 스튜디오 레이 포에트리를 운영한다. 흰 털, 황갈색 털을 두루 가진 웃기고 사랑스러운 개 연두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로 연미색 옷이 편해진 사람. 종종 털이 잔뜩 붙은 검은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니는 사람.


instagram @indexoflight, @laypoetry


김현지 Hyunji Kim


질 샌더의 쇼퍼백. 패션 에디터로 살고 있지만 가방에 있어서는 무심했다. 왠지 비싼 가죽 가방은 내 물건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디를 가든 손에 쥔 핸드폰과 신용 카드 한 장이면 충분했으니까. 스물일곱, 겁도 없이 갑작스레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 선언을 했다. 가장 두려웠던 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낯선 공기의 사무실과 옷을 갖춰 입은 어른들과의 미팅이었다. 나 역시 어른의 물건을 갖춰야 할 것 같아 질 샌더 가방을 구매하게 됐다. 미팅 전, 마음을 재정비하고 힘을 얻는 일종의 의식으로 가방에 명함을 챙기고 노트와 펜을 골라 넣곤 했다. 하지만 계절이 지나고 옷장 정리를 마치니 이상하게도 손이 가질 않았다. 나는 아직도 핸드폰과 카드 한 장이면 충분한 사람인가보다. 이제 짐이 많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가방을 내놓는다.


직업은 패션 에디터. 아홉 시부터 여섯 시까지는 명함의 업에 충실히 한다. 그 외의 시간에는 소설 ‘점 이야기’를 쓰고 있으며, 때때로 패션 에디토리얼 개인 작업을 한다.


instagram h_y_u_n_j_ , @job.dongsani


김효재 Kim Hyo Jae / Prenatal Care Center


만약 {나} 라는 옷이 있다면, 2018년의 나는 {ZARA를 입을 수 없다면 벌거벗고 다니겠어 #ZARAgiirlll}라는 텍스트; 반드시 실버 스팽글 그리고 볼드체! 가 적힌 파이톤(Python) 패턴의 블랙 셔츠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당시 자라에서 파이톤(Python)컨셉으로 옷이나 가방, 신발 등을 런칭했고, 나는 오직 강하고 심플한 텍스쳐와 패턴만이 나만의 영험하고도 강인한 바이브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효재는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디어 퍼포먼스 작가로, 그동안 작업 세계관을 명명하는 '디폴트'와 신인류 'Z'세대에 관한 고찰을 이어 왔다. 현재 PCC(Prenatal Care Center)를 설립, 언젠가 기계의 도움으로 사이버-영생을 누릴 본인의 후손들을 위한 태교 음악을 만들고 있다.


instagram cxxion_themadmonk , @prenatal_care_center


김희애 Fhuiae Kim / Studio fych


베를린 여행 중에 마켓에서 샀던 옷이다. 젊은 여성이 친구 한 명과 같이 물건들을 펼쳐 놓고 팔고 있었다. 옆에 있던 내 친구는 오컬트 영화 <성스러운 피>가 연상되는 프린팅이 인상적인 가방을 골랐고 나는 스페인의 모자이크로 덮인 공원인 구엘 공원이 떠오르는 이 옷을 사겠다고 집어 들었다. 두 명의 셀러 친구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말은 몇 마디 안 나눴지만 표정으로 여러 가지가 서로 오고 갔던 장면이 기억난다. 한국에 돌아가서 특별한 날 입고 싶었는데 서울에서는 좀처럼 입을 일이 없었다.


김희애는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프이치를 운영하며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깊은 리서치와 이해 과정을 통한 클라이언트, 창작자와의 협업을 지향합니다.


fych.kr, instagram @studiofych


박보마 Boma Pak / Boma, qhak, FLDJF STUDIO, WTM decoration & boma, Sophie Etulips Xylang Co., …


뉴욕의 중고 샵에서 구매한 Frye 사의 부츠. 각이 잘 잡혀 있는 좋은 부츠. 신발을 잘 만드는 좋아하던 브랜드라 냉큼 집었는데 사이즈 미스로 한두 번 신고도 놓아주지 못했는데 이번이 기회인 것 같다. 그 찰나에 내 발에 잘 맞는다고 합리화를 했던 걸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안녕 나는 보마.


wtm-boma.com


봉완선 bongwansun


친오빠의 결혼식에 입고갈 옷을 찾다가 뜬금없이 구매한 Comme Des Garçons Tricot 가디건. 내 옷의 대부분이 브라캡 같은 어깨 뽕이 들어간 빈티지 원피스인 데다가 머리카락은 폭탄 맞은 모양새다 보니 공개적으로 오빠를 망신 주려는 목적이 아닌 이상 무난한 옷을 입어주는 것이 동생으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부터 다져온 중고 매물 찾는 실력으로 온갖 사이트를 뒤지던 중, 웬 귀여운 가디건을 발견했고 바로 구매해버렸다. 가디건을 사는데에 에너지와 행복한 마음을 다 소진해버리는 바람에 결혼식에 입고갈 옷은 사지 못했고, 결국 그냥 대충 입고 갔다. 오빠에 대한 미안함이 묻어있는 이 가디건은 살갗을 스치는 따가운 스팽글이 매력 포인트. 구매 이후 입고 나간 적은 없다.


주로 퍼포먼스 기반의 영상 작업, 그림과 사진을 재료로 한 그래픽 이미지를 만들며 기획과 디자인을 병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손으로 주물러 빚어내는 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희한한 무늬와 어깨 뽕을 좋아해서 10년 넘게 빈티지 의류를 모으는 중.


instagram @nusnaw


비고 bigo


프랑스에서 돌아온 몇 년 후, 향수의 감정으로 상수역 A.P.C.에서 구입한 알파카 코트다. 미니스커트와 롱부츠, 미니 크로스백을 매치해 잘 입고 다녔다. 이 귀엽고 단정한 코트는 그간 털이 꽤 빠지고, 겉으로 티 나진 않지만 단추 여밈 안쪽으로 외피가 동전만 한 크기로 뜯겼다. 너그러이 이해하고 알파카의 수명을 연장해 주실, 프랑스를 좋아하는 분(?)이 구입하시면 좋겠다.


사람들이 몸과 주변 사물을 인지하고 소통하는 방식에 호기심을 가진다.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영상, 인쇄물 등의 매체로 작업한다. 옷을 살 때는 재미난 옷과 활용도 높은 옷 사이에서 항상 고민한다.


pbi-go.org / instagram @b_i_g_o_


소영은 Youngeun So / Goosler


런던서 대학원 다니던 시절 걸핏하면 옥스퍼드 스트리트에 있는 탑샵 플래그십 스토어에 갔다. 레깅스나 양말이 필요해도 가고 촬영에 쓸 주얼리를 사러도 가고 그냥 시간이 남아도 갔다. 거기선 매일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난 뭐 하나 놓치기 싫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옷이 팔려나가는 광경과 그 무엇도 아닌 옷을 팔겠다고 다 같이 분투하는 이 산업을 좋아한다(사랑한다고 하려다가 너무 징그러워서 좋아한다고 썼다). 그땐 아직 인플루언서라는 말도 없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딱 인플루언서인 사람들을 불러다가 매장 한편을 내주고 ‘편집’을 시키기도 하고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인 디자이너들과 거의 매 시즌 컬래버레이션 라인을 내놨다. 1층엔 프로즌 요커트 가게가 입점해 있었고 뷰티 라인을 막 론칭했고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매장에서 픽업하는 O2O 서비스도 시작했다. 뻔질나게 탑샵을 드나들 때 산 이 재킷은 ‘탑샵 부티크’라고 탑샵 치고 제법 만듦새가 좋고 클래식한 라인 제품이다. 고백하자면, 패션 블로거 수지 버블이 같은 소재의 셋업을 입은 걸 보고 따라 샀다.


패션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패션 정보사와 패션 제조사를 거쳐 지금은 패션 이커머스 회사에 다닌다. 매번 더 많은 소비자를 서브(serve) 할 수 있는 기회를 선택했다. 부캐가 유행하기 전부터 이사람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이사람은 구슬러(Goosler)를 만드는데 간혹 몇 안 되는 웃긴 글로 이사람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instagram @goosler.yisaram, @yisaram.goosler


송민정 Song Min Jung / SERIOUS HUNGER


어느 해 여름, 교복처럼 입고 다닌 하와이안 셔츠입니다. 언젠가 썩 멋지게 소화해낸 옷이 오늘따라 초라해 보여서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온 경험 없으신가요? 제게 이 셔츠가 그렇습니다. 길고 긴 장마 사이 맑은 날이면 어떻게든 입어보려 시도해봤지만, 거울 앞의 내 모습… 어쩜 이럴 수 있죠? 이제 이 옷과 작별할 시간이 왔나 봅니다. 저보다 멋지게 소화해낼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서울에서 활동한다. 현재 상태, 기분, 분위기 등 일시적인 느낌을 특정 장소나 상황 속으로 ‘업로드’하며 스크린과 신체 사이 힘의 관계를 추적해오고 있다. 작업이 지금을 감싸는 문화적 요소의 표면을 차용해 다루는 것은 당대 리얼리티다. 나는 현재와 픽션이 포개어져 발생하는 낙차를 유도하고, 그사이 생성된 틈을 꺼내어 소비할 수 있도록 서비스한다.


instagram @serioushunger


안초롱 An Chorong


"너는 왜 내가 원피스를 입고 나갈 때마다 그렇게 나를 대하는 거야? 고민해서 상의와 하의를 맞춰 입는 것보다 하나만 입으면 되는 원피스가 나는 더 편한걸. 오늘 날씨에 딱 맞는 블라우스가 있지만 그것과 어울리는 스커트가 없을 때, 어제 배송받은 데님 팬츠에 어울리는 티셔츠가 없을 때, 셔츠와 팬츠, 심지어 부츠까지 모두 갖춰 입었는데 거기 어울리는 자켓이 없을 때, 옷장 앞에서 얼마나 시간을 허비하는 줄 알아? 네가 원피스를 입은 나를 오해하는 것이 싫어서 이번 기회에 그때 입고 나갔던 원피스 하나를 처분하려고 해. 원피스는 죄가 없어."


사진 매체를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미술가. 최근 개인전 《Natural Gene》을 열었고 동명의 사진집을 냈다. 사진 듀오 압축과 팽창(CO/EX)에서 '압축'을 맡고 있다. 현재, 한때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헤어져 60일간 세계를 떠도는 이야기를 '팽창'과 함께 써나가는 중이다.


whatsrong.com


양민영 Meanyoung Lamb / Bulldozer


Siv Støldal 반반셔츠. 내 친구 소영은이 준 옷이다. (영은이에게 샀나…? 기억이 잘 안 난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옷을 좋아하긴 했지만, 특히 대학생 때 옷을 많이 사고 좋아했던 거 같다. 돈은 별로 없지만 시간이 많아서가 아니었을까. 하여튼 나 - 소영은 - 이다인 3인방은 자주 옷을 사러 다녔는데, 옷을 사는 게 재밌었던 건지 같이 노는 게 재밌었던 건지 어쨌든 재미있었다. 특히 서대문에 있던 ‘빈티지 파이'는 학교에서 가까워 자주 갔던 추억 어린 곳으로, 서로에게 어울릴만한 옷을 추천하기도 하고 일부러 과감한 옷을 들이대면서 잘 어울린다고, 사라고 부추기기도 하면서 옷도 구경하고 맛있는 김치찜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좀 멀지만 학동사거리에 있는 '데일리 프로젝트'에 가서 전방위적인 디자인의 디자이너 브랜드 옷을 구경하기도 했다. 당시 북유럽에서 온 클린하면서 아방가르드한 남성복 브랜드 제품을 데일리 프로젝트에서 많이 팔았던 거 같은데 이 셔츠도 그중 하나다. 이 옷은 원래 맨 처음에 소영은이 산 옷이다. 나는 프린트가 화려하거나 개념적으로 특이한 옷(예: 한쪽 팔은 길고 한쪽 팔은 짧은 것)을 보면 반응을 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셔츠를 반씩 붙인 이 셔츠를 영은이가 입고 왔을 때 보고 이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중한 친구분께서 이 셔츠를 안 입는 날이 왔고 어느새 내 차지가 되었다. 대학생 때 함께 쇼핑을 다니던 3인방은 옷 사이즈도 취향도 다르지만, 여전히 안 입는 예쁜 옷이 있으면 서로에게 입을 건지 물어보는 사이다. 그리고 이제 이 옷이 나에게 잘 안 입는 예쁜 옷이 되었다. 추억 보정이 되어서가 아니라 요즘 트렌드에도 뒤쳐지지 않는 내 셔츠! 나보다 더 잘 입을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옷정리에 내놓는다. 다음에는 누가 이 옷을 입게 될까?


책과 옷을 좋아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잡지 <쿨>, <옷정리>와 같은 옷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을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평범한 사람. 동시대 주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


meanyounglamb.com, instagram @meanyounglamb


우한나 Hannah Woo


엄마 출장으로 라스베이거스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는 반 자유 여행이었다. 라스베이거스는 낮이든 밤이든 시끄럽고 현란한 슬롯머신과 포커 테이블이 그득했다. 일대를 뒤덮은 호텔들은 지하 공간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나는 그 통로를 통해 몇 킬로 미터를 걸어 바니스 뉴욕의 편집샵에 도착했다. 말로만 듣던 그 샵의 옷걸이에는 평소 보지 못했던 것들이 세련되게 걸려있었고, 가격표를 보고 여러 번 놀라며 조용조용 보고 있었다. 그때 다가온 아름다운 복장의 남성 점원이 나에게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고, 말끝마다 sweet, lovely라는 말을 붙여줬다. 나한테 어울릴 원피스를 찾는다고 말하니 그때부터 그는 온 매장을 휩쓸며 5-6개의 옷걸이를 예쁘게 집어 돌아왔다. 너무나 놀라운 것은 단연 가격이었고, 더욱 놀라웠던 건 정말 나한테 어울릴만한, 체형의 결점을 커버 해주는 평소 즐겨입는 라인들을 골라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능력치에 감탄했고, 당시 20대 중반을 넘어서며 좀 더 갖춰진 옷이 필요한 상태라고 스스로 판단하여 뭐라도 사서 나가고 싶어졌다. 그렇게 해서 고른 옷이 이 원피스였다. 평소 잘 어울리는 각 잡힌 민소매의 전형을 따르는 넥과 숄더 라인이 아주 맘에 들었고, 때마침 친구의 결혼식에 갈 때 입을만한 적절한 격식을 갖춘 소재와 디테일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상체는 마르고 하체가 좀 더 튼실한 나의 몸매를 보다 균형 있게 보이게 하는 맵시가 좋았다.


캐릭터 디자이너가 꿈이었고, 또 패션 디자이너가 꿈이었는데, 미술 작가가 되면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스무 살부터 고양이 한 마리와 살고 있으며, 수많은 원피스를 샀고 또 누군가에게 보냈고 버렸다. 비비안 웨스트우드 할미를 좋아한다.


instagram @hannahgavetheletter, @hannah.flashed.that


위지영 Jiyoung Wi / Sorrow Club


최근 프라다가 옛 시그니처 디자인을 리부트 한 모양이다. 그럴 조짐이 보여(?) 몇 년 전부터 빈티지 나일론 프라다 가방을 이베이에서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중 처음으로 샀던 가방을 내놓습니다. 작지만 수납력이 꽤 괜찮다. 펜듈럼처럼 흔들면서 걸으면 기분이 좋다.


소설가이자 뮤지션. 제도와 비제도 사이에서 소설을 쓰고, 클럽과 갤러리 사이에서 사운드를 다룬다.


soundcloud @jiyoungwi / instagram @witheferalchild, @sorrowclubseoul


유지원 Jiwon Yu


2014년, 베를린의 한 빈티지 숍에서 녹색 블레이저를 샀다. 연식을 알 수 없는 이 옷은 내 소박한 체형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타지에서는 돈을 헤프게 쓰기 마련이다. 입국 12시간 전,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던 중 갑자기 친구가 쓰러졌다. 병원비를 걱정하며 벌벌 떠는 미국인을 응급실에 두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예상 출발 시각을 훌쩍 넘긴 후였다. 허겁지겁 짐을 챙기다 가방에 채 들어가지 않는 두꺼운 양장본 두어 권과 "인사도 없이 가서 미안해요. 책이 무거워서 챙겨가지 못하게 됐어요. 정말 미안해요"라고 쓴 노트를 두고 나왔다. 한국에 돌아와서 그 블레이저를 집어 입을 때마다 두고 온 사람과 책, 만 하루 동안 내가 움직였던 거리, 바닥에 엎어진 친구와 널브러진 짐의 무게를 생각한다. 정신없는 와중에 기껏 챙겨온 옷의 핏은 좀 바보 같았고, 그걸 입을 때마다 나는 어리석었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이 블레이저를 나보다 현명하게 입을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instagram @bbyabbya_kim ,@project_narcissist , @svc.seoul , @ypc.seoul


이다인 Dain Lee


나의 첫 더플코트는 중학생 때 구입한 어깨가 꼭 맞는 정 사이즈의 카멜 컬러의 코트였다. 검정 스타킹을 신고 교복 위에 입기 딱 좋은 스타일의 납작하고 밋밋한 실루엣의 옷이었다. 그때의 나는 멋이라곤 부릴 줄 모르는 촌스럽고 다소 자신감 없는 학생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자라서 소위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도 그 옷을 입고 서있는 어린 나의 모습이 마음 한구석에 안쓰럽게 남아있었다. 이 코트는 작년 겨울 새로운 프로젝트 준비 차 간 도쿄 출장 중에 들른 빔즈 보이(Beams boy) 매장에서 발견했다. 아름다운 프린트의 실크 블라우스에 트위드 울 팬츠를 입고, 이 코트를 무심하게 걸쳐준 후 나이키 운동화를 신어주면 멋질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2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나에게 온 코트는 나의 좁은 어깨를 더욱 왜소하게 만들었고 여전히 어딘가 맞지 않는 옷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기어코 거울 속의 내 모습에서 그 시절의 나를 보고 말았다. 20년의 쇼핑 경력과 10년의 옷 만들기 경력에도 나는 아직도 종종 실수를 한다. 감정적인 쇼핑은 이렇게 뼈아프다. 하지만 좋은 원단으로 탄탄하게 잘 만들어진 이 멋진 코트는 죄가 없으니,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로 가 나의 실수가 만회될 수 있길 바라본다.


옷을 디자인하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 여러 브랜드를 거치며 다양한 스타일을 경험하였고 그만큼 옷장에도 다양한 옷이 쌓여왔다. 컬러와 프린트, 소재가 믹스 앤 매치(Mix and Match) 되어 풍성하게 표현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입어지는 옷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이다. 멋지고 인상적인 것을 만들고 싶은 마음과 쓸데없는 것을 더는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 두 마음이 싸워가며 지난 10여 년의 커리어를 쌓아왔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 때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가끔 친구들을 위한 사진을 찍기도 한다.


instagram @dain_lee__


이민지 MINJIYI


동생과 나는 체격이 비슷해, 서로의 옷이 잘 맞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어렸을 때 동생은 내게 팔다리가 짧아진 옷을 물려 입었다. 엄마가 새 옷을 살 때면 똑같은 디자인의 색이 다른 옷을 골라, 동생과 나에게 함께 입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쌍둥이냐는 질문을 받곤 했고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동생이 나에게 옷을 물려주기도 한다. 팔다리가 짧아졌다기보다 여러가지 이유로 입지 않는 옷들이다. 이 점프수트도 그렇다. 마리메꼬 특유의 동글동글한 무늬가 박힌 점프수트를 몇 차례 걸쳐보지만 입고 나가진 않는다. 내가 상상한 점프수트는 무늬가 없는 선명한 단색에 좀 더 튼튼한 것이다. 커서야 알게 되었지만, 우리의 취향은 비슷한 가운데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서로의 옷을 탐내고 서로의 옷을 입는다.


본 것과 못 본 것을 사진으로 찍는다. 찍은 것들의 시-차를 가늠하며 사진에 이런저런 문장을 붙인다. 그런 것들을 모아 전시를 열고 사진책과 사진책 비슷한 것들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사진을 찍기 전, 오랫동안 보는 시간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instagram @mmminjiyi , leeeyooo.tumblr.com


이유성 Lee Eusung


2020년은 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 단출하게 만드는 데 몰두했다. 옷은 생각과 생활 패턴을 번갈아 반영하므로, 옷장 정리는 이 과정에서 꽤 흥미로운 게임이 되어 주었다. 기능, 색, 유용도, 착용 빈도 등에 대해 질문을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내 지금을 보았다. 결국 나의 생활 루틴과 작업 특성에 따라, 가볍고, 먼지가 잘 털리며 거칠게 다뤄도 좋을 옷들이 주로 남았다. 옷장 밖으로 나온 것들 중, 끝내 내게 퀴즈처럼 남아있던 새 드레스를 여기에 마지막으로 펼쳐 놓아 본다. 도전자가 나타나 이 중성적이고 과감한 옷을 자신만만하게 소화해줬으면. 청키한 통굽 부츠로 기장을 커버하고, 와이드 블랙 팬츠와 함께 입어도 멋질 것이다.


서울에서 조각과 드로잉 작업을 한다. 일상적인 심상이나 물리적 감각, 자연물의 구조, 문화적인 정보 등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의 에너지를 관찰하며 연결해 나간다.


eusunglee.com / instagram @thedeepestweb


임효진 LIM HYOJIN


고백하건대 나는 시네필이었다. 전국에서 열리는 모든 영화제에 가고 시네마테크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내 시간을 상영 스케줄과 영화제 일정에 모두 때려 박아도 시간이 남아서 남는 시간엔 나랑 비슷한 사람들과 술을 마시던 때. 팬데믹에 접어든 지 고작 반년, 만석인 상영관의 텁텁한 공기 속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던 일이 아득한 옛일 같다. 이해되지 않고 그저 흘러만가는 이야기를 많이 봐 둔 것이 사는데 도움이 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이해의 폭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의 폭이 일찍이 넓어진 건 인생에 있어 다행인 일이다. 오래된 영화제의 기념품들을 정리하면서 여러 가지를 함께 정리했다. 옷정리는 정말 좋은 행사네요!?


서울의 스펙터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건을 염두에 둔 장면(scene)을 수집한다. 사진집으로 『모텔 꿈의 궁전』, 『서울저널』(coming soon!) 이 있다. 현재는 서점에서 근무하고 있다.


instagram @seoul_journal


장다해 Chang Dahae


행거 앞에 늘 메인 아이템처럼 걸려 있었다. 가늘고 얄팍한 느낌의 소재가 마음에 들었다. 정작 몸에 걸치는 일은 없었지만 방 안에 좋은 컬러의 태그를 걸어 둔 기분이 든다. 실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진 늦여름에. 누군가에게도 이 색이 밝고 부드럽고 경쾌한 값으로 쓰이길 바란다.


사물의 깨끗한clean 상태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함께 회화가 사물을 명료하게 보이게 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는 미술 작가.


instagram @chang.dahae


장희진 Heejin Jang


너무너무 추웠던 2016년 3월 몬트리올 길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들어간 편집샵에서 구입했다. 분명 입어보고 마음에 들어서 샀지만, 내겐 어울리지 않는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눈은 셔츠를 입은 내 모습이 아닌 다른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날 내게 이 셔츠를 권한 점원도 같은 셔츠에 짧은 겨자색 니트 스웨터를 겹쳐 입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갈색 올림머리, 노랑 니트와 하얀 셔츠의 대비, 적당한 길이로 무릎 뒤까지 늘어진 셔츠의 실루엣, 모든 것이 참 조화롭고 예뻤다. 나는 아마도 거울 속의 내 모습보다는, 그녀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보였던 목덜미의 검은색 3선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점원의 얼굴은 뉴욕에 돌아오자마자 빠르게 잊혀졌다. 그녀의 잔상이 사라진 뒤 비로소 내 모습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셔츠와 나는 왠지 어색하고, 썩 자연스럽지 않았다. 우리가 친해지는 순간은 끝내 오지 않았다. 나의 좁은 옷장 안에 가둬두기에 이 옷은 너무 멋지다. 특별한 날에 선택받고, 질리도록 사진 찍히고, 누군가의 기억에 각인되어야 한다. 나는 그저 이 셔츠를 입은 다른 누군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싶다.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장희진은 즉흥 컴퓨터 음악을 통하여 소음이 만들어낸 혼돈의 공간을 연출한다. 사소한 일상의 소음, 필드 레코딩, 프로세싱된 주파수들의 축적과 합성을 통하여 디지털 사운드로 이루어진 패닉, 또는 명상의 순간을 그린다.


www.heejinjang.com, @quiquijin


전소영 Jeon Soyoung


반듯하게 눌러 놓으면 완벽한 원을 그리는 Le Béret Français의 검은색 모자는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데다 위트 넘치는 빨간색 꼭지를 자랑한다. 심지어 튼튼하다. 나에겐 다소 과감하고, 내 두상에 얹기에는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디자인 탓에 자주 쓰진 못했지만 이리저리 둘러보고 만져보면서 튼튼하게 설계된 동그란 모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쓰지 않고 갖고만 있어도 만족스러운 아이템이었지만, 이 모자도 이제 외출할 때가 되었다. (모자에 이어 역시나 튼튼한) 보관용 천 가방 안에만 담겨 있기엔 너무 아까운 모자다. 몇 번 쓰지 않았고 보관도 잘해두어 흠잡을 데 없지만 강아지 털이 한두 가닥 묻어 있을 수도 있다. 이 점 양해 바란다.


아주 거대하거나 반대로 너무 작은 것이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예를 들어 공항이나 항구 같은 거대 인프라의 이미지와 이것을 구성하는 다양한 움직임과 크고 작은 신호에 관심을 두고 있다.


jeonsoyoung.kr
instagram @jn.soyoung


정희민 Heemin Chung


내 옷장에는 두 가지 섹션이 있다. 때가 되면 먼지를 닦고 모양을 잡아주며 보관하는, ‘내 옷’이라는 정서적 가치를 갖지만 기능을 갖지 못한 옷들, 그리고 교복처럼 돌려가며 입지만 언제 버려도 아쉽지 않은 기능적인 옷들. 요즘처럼 물건에 대한 집착이 우습게 느껴질 때는 매일 손이 가는 10벌 남짓한 옷만 빼놓고 옷장 그대로 내다 버리면 얼마나 시원할까 싶은데, ‘내 옷’을 떠나보내는 데에는 나름의 에너지와 매너가 필요하다. 10년이 넘게 옷장 밖으로 나가지 않은 이 가방은 노트북을 넣으면 너무 무거워져 어느 순간부터 잘 들지 않게 되었다. 가죽 제품의 특성상 생기는 얼룩이나 태닝 정도가 마치 특정한 시간을 함축하는 느낌인 데다, 오래 합을 맞추어 길이 잘든 화구들처럼 보는 것만으로 환기가 되어 그냥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기능이 어긋난 옷장을 보면 괜히 쓸쓸해진다. 타협하지 못한 어떤 마음들의 타래를 풀지 않은 채 낑낑 짊어지고 사는 것 같아 몇 가지 물건들을 정리하다 보면 한편으로 옷과 함께 나조차도 기능적 인간으로 변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잡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삶의 임시적인 상태에 적응해가는 것인지 철이 드는 것인지 멋이 없어지는 것인지 잠깐 생각하지만... 역시 가벼운 편이 좋다.


그림을 그립니다.


heeminchung.com
instagram @heemintheactivated


조은혜 Eunhye Cho


60수 유기농 면으로 만들어진 여름 바지. Not ours 제품. 선선한 날씨의 예쁜 날, 이 바지를 입고 나들이를 간 적이 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였다. 우리는 달달하게 취했고 시답잖은 얘기를 나눴다. 반짝거리는 피부를 하고, 돗자리에 드러누워 해가 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장면이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무언가를 놓는 일은 참 어렵다. 추억을 놓는 것만 같아 망설여진다. 오래 함께한 것일수록, 큰 마음으로 대했던 것일수록 더 그렇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새로운 것들은 너무나도 많고 이제는 점점 벅차다. 내 용량을 업그레이드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차라리 서먹해진 것들을 보내줘야겠다. 나보다 더 사랑해주고 신경 써줄 누군가가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프리랜서 활동가, 파트 타임 클라이머, 창작자. 재밌는 일을 찾아다닙니다. 사진 찍기, 관찰하기, 손가락 하트, 시 쓰기, 춤추기, 노래하기, 리코더 불기, 음식 만들기, 색칠하기 등의 능력이 있습니다.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완전 잘합니다. 못 하는 것은 거의 없음. 옷 정리가 어렵네요.


instagram @nomoneynodream, @cihatesunnnner


최고은 Choi Goen


엄마,아빠, 사랑해요♡


미술가. 개인전 《Disillusionment of 11am》(토마스파크 갤러리 뉴욕, 2019), 《오렌지 포디움》(시청각, 2018), 《토르소》(김종영 미술관, 2016)를 진행했다. 단체전 《아나모르포즈: 그릴수록 흐려지고, 멀어질수록 선명해지는》(WESS, 2020), 《화이트 랩소디》(우란 미술관, 2020), 《리얼- 리얼 시티》(아르코 미술관, 2019), 《불안한 사물들》(서울시립 남서울 미술관, 2019)에 참여했다.


www.choigoen.com
instagram @dionisox, @ckouni


최수인 CHOI SU IN


결혼을 한 나에게 5년 만에 만난 미국에서 온 외숙모가 선물해준 원피스. 많이 감사했다. 원피스라는 선물은 황홀한 이벤트였다. 그러나 딥 핑크다. 생각해보니 나는 핑크에 관심이 없고 또 별 이유 없이 일부러 꺼리는 편이다. (초록에 열광한다) 내 손으로 절대 고를 일 없으니 일생에 한번 핑크가 되는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입어봤지만 나에게 혹여 주어질 타인의 시선들이 상상만으로도 불편하여 영원히 입지 않기로 한다. 그래서 판다.


나는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가짜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에 관한 상상을 유화로 표현하는 페인팅 작가이다. 나의 상상에는 주로 털이 나고 이빨을 드러낸 모습의 생명이나 감정을 표출 중인 자연물의 형상이 등장한다. 화면은 보통 등장하는 것의 극적인 순간이나 역동성을 띤 찰나의 장면이 많다. 장면의 내용은 '화'가 난 상태의 대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www.choisooin.com
instagram @choisooin, twitter @soonisooin


한지형 Jihyoung Han


오사카를 돌아다니다 발견한 h.NAOTO의 슬립은 한치도 고민할 필요 없이 내가 바라온 가장 완벽한 슬립인 듯 보였다. GACKT와 HYDE를 사랑했던 어린 날의 바이브가 아직 남아 있던 것일까? 마음속으로 ' 「그때」를 지금 갖게 되면 어떻게 할 건데!’라고 외치며 결제한 이 옷은 결국 예쁜 소품이 되어 내 방 한쪽을 장식했다. 마주하면 늘 아름답게 보이고 그만한 것이 없는 듯하지만, 현재와는 다른 타임라인으로 동떨어져 슬라이드 하게 되는 대단한 장치.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희망과 믿음을 유지하는 게 어려워지니까 나는 계속해서 안전한 과거를 발굴하고 거기에 내 몸을 끼워 맞추는 거다. 지금도 과거가 되어서 미래로부터 발굴 당하겠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페인터. 청소년기를 일본 빈티지 샵에서 보내며 복잡한 취향을 갖게 되었다. 최근 옷이 너무 많다는 걸 체감하고 소중한 피스들을 정리하고 있다.


jihyounghan.tumblr.com
instagram @void_terrain


함윤이 Yuni Haam / 스튜디오 풀옵션


고향은 지리산 안쪽의 마을로, 젊은이들을 위한 옷가게가 거의 없었다. 열아홉 살이 끝날 무렵까지 남들이 준 옷 위주로 입고 살았다. 스무 살에 상경하여 도심의 각종 상점을 돌아다녔다. 너무 많은 옷들이 있었으므로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남들이 준 옷의 편안함을 잊지 못하여 구제 옷가게를 찾아다니다가 이 코트를 찾아냈다. 종로구 안쪽의 옷가게였다. 아주 환한 빨강이고 그 계절에 적당한 두께의 옷이었다. 함께 간 친구들의 박수 아래 옷을 샀다. 그해에 산 가장 비싼 옷이었으나 기대만큼 자주 입지는 않았다. 입을 때마다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기는 했다.


주로 소설을 쓴다. 시나리오와 비평은 더 잘 쓰기 위해 공부 중이다. 언어로 시작하는 각종 픽션에 관심이 많다. 스튜디오 풀옵션의 텍스트 담당이다. 최근에는 김형도 디자이너와 협업하여, 예언에 관한 소설 을 연재하고 있다.


instagram@youninout, @studio_fulloption


Mimi


바야흐로 제가 모델 일을 처음 막 시작했던 2018년도 여름, 멋진 디자이너 Keenkee에게 보수로 받은 모자입니다. 제 얼굴에는 챙이 너무 길어서 더 좋은 주인이 있나 내놓읍니다. 모델이라는 직업 특성상 옷이나 소품 선물을 자주 받게 되는데, 친구들에게 나눠 줄 수 있어 좋아요. 친구들 사이에서 선물을 자주 하는 캐릭터를 잡게 도와준 브랜드들… 이 자리를 빌려 정말 감사합니다. 바로 선물로 주진 않고요, 사진도 찍고 홍보도 한 후 열심히 입다가 줘요. 계절이 바뀌면 봄맞이 Otjungri를 해야 하니, 꿩도 먹고 알도 먹고.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Keenkee.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연두색이나 노란색을 많이 봐서 그런지 이런 상큼한 색이 계속 끌려요. 제 친구 채정이네 어머니께서 나이가 들으면 화려한 색을 좋아하게 된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적어도 저랑 채정이는 요즘 알록달록한 옷을 엄청 입게 되네요. 그러니까 무채색 착장에도 이 모자를 포인트로 써주면 바로 시선 집중. 챙이 좀 긴 편이라 자외선 차단이 정말 잘 돼요. 제가 옷을 입을 때는 여러 가지 페르소나가 있는데, 한창 스케이터 룩에 꽂혀있을 때 헐렁한 바지에 이 모자를 자주 썼어요. 근데 제가 그리 쿨하지 못해서, 나한테 좀 더 잘 어울릴 스타일이 있을 것 같아 요즘엔 스케이터 룩을 잘 입지 않아요. 저는 찐 스케이터가 아니니까요. 다들 영화랑 음악을 좋아한다면, 스케이트보드 문화에 대해 잠깐 엿볼 때가 있지 않나요? 괜히 저렇게 입고 다니면 나도 스케이트보드 잘 탈 것만 같고. 모두가 스웨그 넘치고. 끼고 싶은 느낌. 근데 저는 절대 스웨그 넘칠 수 없다는 걸 일찍 깨닫고 포기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뿜어나오는 스웨그 정말 부러워요. 닮고 싶어요. 이 연두색 긴 챙의 모자를 쓰면 살짝 얻을 수 있어요. 그 느낌. 이 모자에 다초점 렌즈 안경을 쓰고 헐렁한 바지에 살짝 맞는 듯 안 맞는 듯한 사이즈의 해진 티셔츠를 입어주면 그대는 바로 뉴욕 Dimes Square 스케이터. 저는 옷 스타일이 자주 바뀌는 편이었는데, 요새는 그냥 눈에 보이는 걸 집어 입게 된 거 같아요. 그런데 한창 옷에 관심이 많았을 때,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옷매무새, 모자의 각도, 얼마나 비니를 푹 눌러쓰는지 등의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를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생겨났어요. 대부분 다 똑같은 옷을 입지만, 그런 작은 제스처들이 내가 원하는 느낌에 쉽게 가닿게 해주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되죠. 돈도 필요합니다… 이 모자를 쓰시면, 그대는 바로 스웨거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겟 하세요!


글 쓰는 게 익숙하지 않지만 열심히 써보도록 할게요. 이것저것 주워 모아다가 이상한 거 열심히 만드는 대학원생입니다. 가방끈만 길어지고 사회적인 쓸모에서 점점 밀려 나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비행기를 엄청나게 타며 하늘을 오염시킵니다. 이번에 뉴욕 들어가면 최대한 한곳에 머물러볼 예정인데, 엄마를 닮아 변덕이 심해서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제 한국에 있는 친구들도 그만 오래요. 내일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거든요. 지금 밤새우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옷정리 운영하시는 분들도 절 추천해주신 분도 너무 글을 잘 쓰시는 분들인지라, 제 소개 글은 간식처럼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 맞춤법도 자주 틀려요… 그런 와중에 옷정리에 참가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한국의 여성 창작자들은 제 시스터즈들 입니다. 혼자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창작자분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거예요, 아마. 가끔 질투 나서 뾰로통해 있는데, 대부분은 다들 너무 멋있어서 나도 열심히 해야지, 하고 다짐하게 되는 순간이 많아요. 옷정리에 두 번 놀러 갔었거든요. 갈 때마다 뭘 하나씩 건져왔던 기억이 나네요. 올리브색 원피스랑 남색 비니를 구매했었는데, 좋아하던 그 비니를 잃어버렸을 때 똑같이 만들고 싶어서 뜨개질을 시작했어요. 논현동에 있는 뜨개방에서요. 근데 시카고에 있는 친구네 집에 두고 온 걸 알아채서 그 친구가 보내줬어요. 2달 걸렸습니다. 받기까지. 그 정도로 옷정리에는 잇 아이템들이 많다는 점. 제 멋진 모자도 잘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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